상고시대
삼한의 부족국가시대에는 마한의 세력권에 있었다.
삼국시대
백제의 세력확장으로 근초고왕 연대(346~375)에 백제에 병합되어 물아혜 군이였고, 신라 경덕왕대에는 면주에 속했다. 삼국말엽 고려태조가 수군을 이끌고 이곳을 거쳐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나주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지명의 유래는 나주의 남쪽 포구(남포)라 하여 이곳을 목포(남포→맑포→목포)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그보다는 지형이 마치 목처럼 중요한 역할을 해서 목개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써서 목포라고 하는 설이 더 유력하다.
※ 실제로 목포입구에 큰목(대항), 작은못(소항)이라는 지명이 있다.
고려시대
혜종 3년(946)에 물양군이라 개칭하였다가 6대 성종조(995)에는 해양도 원라주목 무안현에 속했으나 그후 제8대 현종조(1018)에 전라도의 한 지역이 되었다. 고려말에 이르러 나주 수진이 외방으로 나오면서부터 이곳은 전략상 요충지로 지목되었다.
조선시대
예종조(1632)에 전라주도, 인조조에 광남도, 영조조(1728)에 전광도의 행정구역에 속했는데 나주지방에 이르는 해로의 입구인 이 곳 목포지방에는 임진왜란때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숱한 전설과 수군진영의 유적을 남겼다. 수군진영의 수장은 만호라 하였는데 목포만호는 전라 15만호 중 수문장이라 일컫고 고하, 비금, 팔금, 도초, 안좌(기좌), 안창, 자은, 장산, 하의, 암태, 우이, 흑산의 12도를 관리했다.
1895년(고종 32년)에 무안군에서 성립하고 1897년 10월 1일(광무 원년)에 개항하여 무안항 또는 목포부라 부르게 되었다. 목포만호는 진영소재지역의 일반행정도 장리했는데 직접 관할에 속했던 곳은 관해, 용당, 산정, 죽교(쌍교), 목포의 5구역이었으며, 이즈음에 외국인의 거주와 무역을 허락하여 일본을 비롯한 영국, 미국인 등 외국인 다수가 입주하게 되었다.
1899년 호안석축공사가 일부 완공되었으며 1905년에는 해상교통에 처음으로 기선을 사용하였고, 1906년 목포~서울간 도로공사를 착공하여 1911년 서울까지 도로가 개통되었다.
상수도는 1898년 개항 이듬해 유달산남쪽의 계곡에 소규모의 제방을 쌓고 목관 또는 죽관으로 급수시설을 갖춘 것이 처음이었으나 충족치 못하고, 1908년에 비로소 상리에 제1수원지, 금동 소재 유달산 계곡에 제2수원지를 만들어 1911년 5월 상수도시설이 완비되었다.
일제식민시대
1910년 10월 1일 목포부로 개칭하였고 관할구역은 위 목포에 한하였으나 1932년 무안군 이로면 죽교리 전역 산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8.6㎢의 면적으로 확장인구 6만으로 전국 6대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1호남선 철도의 부설은 개항시부터 각계의 관심사가 되어 1904년에 서연순이 부설특허를 받았으나 일본인의 한국진출에 따른 이득권 개입으로 좌절되고 우여곡절 끝에 1910년 1월 대전에서 구간착공을 하고 목포에서는 1911년 학교까지의 구간을 착공하여 1913년 5월 15일에 준공을 보았으며 1914년 1월 14일에 전선이 개통되었고 1921년에는 영업용 자동차가 등장하였다.
8·15 광복 이후
1948년 4월 1일 왜색이 농후한 (정)을 동으로 단위구역명칭을 개정하였고,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법의 공포시행에 따라 목포부를 목포시로 개칭하고 1952년 4월 25일 제1회 지방선거로 시의회 구성과 함께 민선시장을 선출했다.
1960년도의 시면적은 10.4㎢, 행정동은 23개동, 22,878가구, 129,667명이었다.
1963년 1월 1일 무안군 이로면 일부를 합병하여 용당리, 상리를 이로동으로, 도서부인 달리, 눌도동 13개 도서를 충무동으로 편성하였으며 1970년 7월 1일 산정1동의 남부를 분동, 연동을 신설하였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 무안군 삼향면 석현리를 이로동으로 합병하였고, 1975년 7월 5일 해방이후 사용하던 재건반을 통단위로 반편성을 새로이하여 301개통, 1382개반으로 설정하였으며, 1979년 5월 1일 용당동을 국도간선도로를 경계로 용당1․2동으로 분동하여 시행정동은 27개동 352개통 1720개반으로 증설되었다. 또 1987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007호(1986년 12월 23일 공포)로 무안군 삼향면 대양리, 옥암리를 편입하였다.
대양동, 옥암동, 석현동 일부를 합하여 1994년 7월 6일 과대동인 이로동을 용해동과 상동으로 분동하여 시행정동은 29개동 508개통 2,353개반으로 증설되었다.
1997년 1월 1일 목포시 조례 제1805호에 의거 용당1동, 용당2동, 산정2동을 제외하고 기존의 29개동을 26개동으로 조정되고, 2006년 8월 7일 목포시 조례 제2322호에 따라 용당1동․산정2동을 용당1동으로, 북교동․무안동․남양동을 목원동으로 유달동․충무동을 유달동으로 통합하여 기존의 26개동을 22개동으로 조정되었으며, 2011년 12월 26일 목포시 조례 제2715호에 따라 옥암동을 옥암동과 부주동으로 조정되었다.
또 시의 면적은 지적법 제15조에 의거 삽진산업단지 매립 및 신도심 2단계 택지 개발 사업으로 0.89㎢, 2001년 북항동 신안비치아파트 뒤편 공유수면 매립으로 0.17㎢, 2002년 소삼학도 호안축조공사로 0.11㎢, 해변로 공유수면 매립으로 0.06㎢, 충무동 신항매립으로 0.67㎢, 2006년 영산강하구언 도로확장 공사로 0.03㎢가 증가하였으며, 측량․수로조사 및 지적에 관한 법률 제77조에 따라 목포신외항 연결도로 사업으로 0.04㎢, 북항 해경 어업지도선 부두공사로 0.04㎢가 증가해 총면적 51.58㎢이며, 시행정동은 23개동 591개통 2,554개 반이다.
그동안 일반주소를 도로명 주소로 개정하고, 인구증감 및 아파트 신축과 세대 증가 등으로 통반신설 및 재조정이 필요함에 따라 주민 편의와 효율적인 행정조직 관리를 위하여 통반을 조정하여 온 결과 2017.3.20.기준 현재 시행정동은 23개동 591통 2,559개 반으로 조정되었다.
요약
상고시대
삼한의 부족국가시대에는 마한의 세력권에 속함
삼국시대
- 백제 근초고왕 연대(346~375) 백제에 병합되어 물아혜군에 속함 신라 경덕왕대 면주에 속함
- 지명의 유래는 나주의 남쪽 포구(남포)라 하여 이곳을 목포(남포→맑포→목포)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그보다는 지형이 마치 목처럼 중요한 역할을 해서 목개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써서 목포라고 하는 설이 더 유력하다.
- ※ 실제로 목포입구에 큰목(대항), 작은못(소항)이라는 지명이 있다.
고려시대
- 혜종3년(946) 물양군이라 개칭
- 6대성종조(995) 해양도 원라주목 무안현에 속함
- 8대현종조(1018) 전라도의 한 지역이 됨
- * 고려말 이르러 나주 수진이 외방으로 나오면서부터 이곳은 전략상 요충지로 지목되었다.
조선시대
- 예종조(1632) 전라도에 속함
- 인조조 광남도
- 영조조(1728) 전광도에 속함
- 고종32년(1895) 무안군에서 성립
- 1897.10.1 개항하여 무안항 또는 목포부라 부름
- 1906~1911 목포~서울간 도로 개통
- 1911년 5월 상수도 시설 완비
일제식민시대
- 1910.10.1 목포부로 개칭
- 1932. 무안군 이로면 죽교리 전역 산정리 일부 병합 (전국 6대도시의 하나가 됨)
- 1914.1.22 호남선 철도 개통
8·15 광복 이후
- 1948.4.1 동으로 단위구역명칭 개정
- 1949.8.15목포부를 목포시로 개칭
- 1952.4.25 제1회 지방선거로 시의회 구성과 함께 민선시장 선출
- 1963.1.1 무안군 이로면 일부를 합병
- 1973.7.1 무안군 삼향면 석현리를 이로동으로 합병
- 1987.1.1 무안군 삼향면 대양리, 옥암리를 편입
- 1994.7.6 이로동을 용해동과 상동으로 분동 (29개동)
- 1997.1.1 29개동을 26개동으로 조정
- 1998.8.25 서해안고속도로 개통
- 2004.4.1 KTX 서비스
- 2006.8.7 26개동을 22개동으로 조정
- 2011.12.26 옥암동을 옥암동과 부주동으로 조정 (23개동)